홍범도 장군 추모, 78년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이야기 2021-08-20 hit.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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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있었는데요. 이 기쁜 날에 맞춰서 기쁜 소식이 함께 전해져 왔었는데요. 바로 홍범도 장군 추모가 가능하도록 홍 장군님의 유해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순국 후 78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는데요. 홍 장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홍범도 장군을 추모하면서 이번 일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정작 본인은 순국 78년 뒤인 2021년에 독립된 한국을 만났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홍범도 장군 추모를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어요. 오늘은 이러한 홍범도 장군님의 삶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할게요.
홍범도 장군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실제 주인공으로 대한독립군을 편성하여 일제시대에 항거했던 인물인데요, 이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에 일어난 전투로 홍범도 장군은 명성왕후 시해 직후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어요. 을미사변이라고 불리는 명성왕후 시해 사건은 1895년 8월에 일어났었는데 이후 을미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요하고, 단발령까지 강제 시행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해 갔어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홍범도 장군은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역과 관북 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는데요. 이 승리 후 동지를 모집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를 조직했으나 이후 일본군과의 세 번의 전투 후에 나머지 동지들은 전사하거나 도주했고, 홍범도 장군 혼자 남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1897년까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에서 단독으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어요.
홍범도 장군은 이러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함경남도 북청에 정착하여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는데요. 이때 주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을 맡아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후 일제가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자 홍범도 장군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운동을 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기도 했어요. 이러던 중 1907년 9월 3일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의 취체법’을 제정하여 강제로 시행했는데, 이 법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반납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이는 포수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어요. 홍범도 장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7년 11월 15일 포수들을 설득하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 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했어요. 이후 1910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을 썼으며 1911년에는 부하 박영신에게 함북 경원수비대를 습격하도록 명령을 하기도 했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 장군은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의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에 잠입해 일본군을 습격했는데,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뒀어요.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6월에는 영화로도 나온 봉오동 전투에서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대승을 거뒀고,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성과로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 바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다음 해인 1921년에 러시아령 흑하자유시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는데요. 같은 해 6월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군이 교전을 벌인 자유시 사변 이후로 이르크츠크로 이동했어요. 그리고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 당한 후 6년 뒤인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순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78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하셨는데요, 어떻게 돌아오신 건지 함께 알아보도록 할게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우리나라와 카자흐스탄이 국교를 수립했던 이후 1992년 이후부터 30년간 추진했던 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 이번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2019년 4월 양국 정상회담 시 우리나라 측에서 협조를 요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요, 원래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해 2020년 삼일절에 유해 봉환이 결정됐지만 코로나 사태로 봉환이 연기되어 오다가 이번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방한을 하면서 드디어 유해 봉환이 이루어졌는데요. 이번 유해 봉환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분들이 홍범도 장군 추모를 진행하고 있고 온라인에도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요.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오프라인으로 홍범도 장군 추모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온라인을 통해 홍범도 장군 추모가 가능해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삶과 함께 유해 봉환 과정을 간단하게 알아봤어요. 물론 홍범도 장군 추모도 좋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오늘을 위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하신 많은 분들을 함께 기리는 것은 어떨까요? 해당 글은 아래 링크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